우리는 종종 예술을 미술관이나 갤러리 안에서만 만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유럽을 여행하며 느꼈던 가장 깊은 감동은, 작고 조용한 마을의 공기 속에 녹아 있는 예술이었다. 유명 관광지를 벗어난 그곳들에는 세상의 주목을 받지 못한 예술가들이 남긴 흔적과, 그 예술을 조용히 품은 시간이 머물고 있다.
요즘처럼 빠르게 소비되는 관광 콘텐츠 속에서, 사람들은 점점 더 '깊이 있는 여행'을 찾는다. 인스타그램에서 본 유명 명소보다, 예술가의 일상이 숨 쉬던 작은 마을을 걷고 싶어지는 이유다. 단순히 예쁜 장소가 아니라, 예술가의 감정과 풍경이 겹쳐지는 공간을 걷는 일. 그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더욱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이번 글에서는 화려하진 않지만, 예술을 사랑하는 이들이라면 반드시 한 번쯤 걸어봐야 할 '잊힌 예술가의 마을' 네 곳을 소개한다. 반 고흐, 에곤 실레, 장 콕토, 샤갈 같은 예술가들이 남긴 발자취를 따라, 소도시에서 만난 잔잔하고 깊은 감동의 순간들을 함께 나눠보자.

🎨 오베르 쉬르 우아즈(Auvers-sur-Oise), 프랑스
파리에서 기차로 1시간 남짓 떨어진 작은 마을, 오베르 쉬르 우아즈. 이곳은 반 고흐가 생의 마지막 70일을 보낸 마을이다. 그는 이곳에서 80점이 넘는 작품을 남겼고, 지금도 마을 곳곳엔 그 그림들이 실제 풍경과 나란히 전시되어 있다.
고흐가 투숙했던 라부 여관(Auberge Ravoux), 그의 무덤이 있는 시골 공동묘지, 고흐가 자주 그린 밀밭 길과 교회. 마을 전체가 살아 있는 미술관 같다. 도시의 소음과는 거리가 먼 이곳은, 반 고흐의 붓끝이 닿았던 감정을 천천히 되새길 수 있는 곳이다.
🚶♀️ 가는 방법: 파리 북역(Gare du Nord)에서 Transilien H선을 타고 Pontoise 방면으로 이동 후, Valmondois에서 환승하여 오베르 쉬르 우아즈 역(Auvers-sur-Oise) 하차. 도보 10분 거리 내 주요 명소 분포.
🚩 팁: 오베르 쉬르 우아즈는 하루 코스로 다녀오기 좋고, 미리 고흐 루트를 확인하면 더욱 풍성한 여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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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틀르제보(Třeboň), 체코
체코 남부, 프라하에서 버스로 약 2시간 거리에 있는 틀르제보는 화가 에곤 실레(Egon Schiele)의 외가가 있던 마을로 알려져 있다. 오스트리아 빈과 체코의 국경 사이에서 활동했던 그는, 이 작은 마을에서 어린 시절 많은 시간을 보냈고 그 기억은 그의 작품 세계에 진하게 남아 있다.
현재는 '에곤 실레 아트 센터'가 자리잡아 그의 스케치와 초기작, 영향을 받은 예술가들의 전시가 상설 운영된다. 유럽 아르누보와 표현주의가 만난 듯한 이 조용한 마을에서, 실레의 강렬한 감성과 상반되는 정적인 풍경을 느껴보는 것도 흥미롭다.
🚶♀️ 가는 방법: 프라하 플로렌스 버스터미널에서 RegioJet 또는 FlixBus 이용해 트르제보니(Třeboň) 버스터미널 도착. 구시가지 및 예술센터까지는 도보 10~15분 거리.
🍃 팁: 자전거 대여 후 마을 호숫가 주변을 돌며 여유 있게 하루를 보내는 코스를 추천!
🎨 멍통(Menton), 프랑스 남부
장 콕토(Jean Cocteau)를 아는가? 시인이자 화가, 연출가였던 그는 프랑스 리비에라의 멍통이라는 해변 마을에 매료되어 생애 후반을 이곳에서 보냈다. 코발트빛 바다를 배경으로 한 이 마을은 그 자체가 시(詩)처럼 아름답다.
멍통에는 '장 콕토 미술관(Musée Jean Cocteau)'이 있으며, 그가 직접 그린 벽화가 남아 있는 결혼식장도 지역 명소다. 코흘리개들보다 예술가를 먼저 기억하는 이 조용한 마을에서, 콕토의 시적 감성과 몽환적인 시선을 마주할 수 있다.
🚶♀️ 가는 방법: 니스(Nice) SNCF 역에서 TER 열차 이용 시 약 30~40분 소요. Menton 역 하차 후 미술관은 도보 5분 거리.
🌊 팁: 아침에 떠나 오후에는 해변에서 여유를 즐기기에 제격. 만약 일정이 여유롭다면, 아래처럼 묶어서 여행해보자.
🚗 예술 기행 루트 추천
- 프랑스 루트: 파리 ➝ 오베르 쉬르 우아즈 ➝ 멍통 ➝ 니스 (TGV 및 TER 이용, 3~4일)
- 중부 유럽 루트: 빈 ➝ 프라하 ➝ 틀르제보 (버스/기차 연결, 3일)
- 동유럽 루트: 민스크 ➝ 비테브스크 (기차로 1박 2일 여정)
예술가의 감성과 함께 시간을 걷는 이 루트는, 단순 관광 이상의 깊이를 선사한다.
🎨 비테브스크(Vitebsk), 벨라루스
유럽 동쪽, 벨라루스의 비테브스크는 화가 마르크 샤갈(Marc Chagall)의 고향이다. 러시아 혁명 전후로 예술의 자유를 갈망했던 그는, 이 유대인 마을에서 자라며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화풍을 구축해 나갔다.
현재는 '샤갈 생가 박물관(Marc Chagall House)'과 '샤갈 아트 센터'가 남아 있으며, 구시가지 골목을 걷다 보면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비둘기, 연인, 도시 풍경을 닮은 장면들이 불쑥 나타난다.
🚶♀️ 가는 방법: 벨라루스 수도 민스크(Minsk)에서 기차로 약 3시간 거리. Vitebsk 중앙역 하차 후 택시 또는 도보로 15분 내 주요 명소 접근 가능.
🕊 팁: 샤갈 작품집을 한 권 들고 가면, 골목 곳곳에서 마치 그 그림 속에 들어간 듯한 경험을 하게 된다.
🌍 예술가의 마을이 다시 주목받는 이유
코로나 이후 여행 트렌드는 빠르게 변화해 왔다. 유명 관광지를 쫓는 '핫스팟 여행'에서 벗어나, 이제는 그 지역만의 정체성을 가진 공간에서 더 깊이 머무는 '로컬 감성 여행'이 주목받고 있다.
특히 예술가가 살았던 마을은 단순한 촬영지가 아니라, 그 예술가가 느꼈던 계절, 공기, 고독을 함께 마주할 수 있는 장소다.
이러한 곳은 도시의 번잡함을 피해 조용한 시간을 보내기에 제격이며, 디지털 디톡스를 겸한 감성 여행으로도 손색이 없다. 예술이 공간과 삶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든 이 마을들은 이제 다시 사람들의 발길을 끌고 있다.
✈️ 여행자의 이야기
처음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 도착했을 때,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이었다. 고흐가 머물렀던 라부 여관 앞에 섰을 때, 그가 왜 이 마을을 그렇게 사랑했는지 알 것 같았다. 빛이 부드럽게 스며들고, 조용한 골목길과 밀밭 사이로 걷다 보면 어느 순간 나도 고흐의 그림 속 풍경 속을 걷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멍통에서는 장 콕토가 그린 예배당의 벽화를 마주했을 때 눈물이 날 뻔했다. 너무 작고 소박한 공간인데도, 그림 하나하나에 시처럼 감정이 깃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찍은 사진보다, 그 공기와 감정이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
이런 여행은 단순한 기록을 넘어 내 감정과도 연결되어 있다. 그 예술가가 남긴 흔적을 따라 걸으며, 내 삶의 속도를 다시 느끼게 된다. 감상은 풍경이 아니라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이런 마을들이 내게 알려주었다.
💭 마무리하며
이 마을들은 화려한 박물관이나 유명 관광지는 아니다. 하지만 예술가가 살았고, 사랑했고, 떠난 자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삶의 박물관’이다. 그들의 감정을 따라 걷는 길 위에서 우리는 예술을 ‘보는 것’을 넘어 ‘느끼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다음 유럽 여행에서는 지도 위 굵은 점이 아닌, 그 곁의 희미한 선 위에서 걸어보자. 그곳엔 잊혔지만 진짜 예술이 살아 있는 마을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